(10) 21세기로 향하는 교회


① 1929년 라테란 정교조약(Patti Lateranensi)에 서명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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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이후 나폴레옹의 교황청에 대한 강압적 정책과 교황들(비오 6세, 7세)에게 행한 유배정책으로 교황직은 추락했으며 당시 유럽의 국가주의적 추세에 따라 이탈리아도 국가적 통일을 추구하고 있었다. 국가의 1/3이상이 교황령이었던 이탈리아는 통일세력과 교회간의 마찰은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위해 결성된 정치적 비밀결사체인 카르보나리(Carbonari: 숯 굽는 사람이란 뜻)와 특히 이탈리아에서 반가톨릭적 경향을 보였던 프리메이슨 비밀결사들이 일으킨 혁명적 소동과 당시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재부흥’(Risorgimento)운동은 교황들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으며 아울러 교황령은 위협을 받게 되었다.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1849-1878 재위) 왕을 정점으로 하는 통일운동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눈사태가 되어 버렸다. 피에몬테의 수상 카부르(C. B. Cavour: 1852-1861)가 이 운동을 지휘하였으며, 빅토리오 엠마누엘은 1861년 3월 피렌체에서 자신을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포하면서 종교정책에 있어서는 자유로운 반성직주의적 노선을 주창했다. 그리고 1866년에는 「수도원 해산법」을 제정해서 점령지역의 모든 수도원들을 해산하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국유화시켜 버렸다. 

 

로마는 아직 프랑스군의 점령으로 보호되었지만 항상 불안정한 상태였다. 의용병 단장 요셉 가리발디(Garibaldi: 천인대장으로도 불림)의 남으로부터의 침입은 1862년과 1867년 프랑스의 원조로 격퇴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의 보불전쟁(1870-1871)으로 말미암아 프랑스군대가 본국으로 철수하자, 피에몬테인들은 즉시 로마를 포위하고 간단한 포격 끝에 1870년 9월 20일 로마를 정복하였다. 이로써 교황령은 1천여 년의 존속 끝에 종말을 고했다. 

 

비오 9세는 바티칸으로 물러났으며 1871년 6월 빅토리오 엠마누엘은 로마를 그의 거처로 정하고, 퀴리날레 궁전에서 머물렀다. 교황의 항의와 파문은 무시되었다. 새 정부는 교황청과의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의미에서 1871년 5월 13일자 소위 「보장법」(Legge delle guarentigie)을 제정하여 교황에게 325만 리라의 연금을 보상으로 제공하고 바티칸과 라테란 궁전 그리고 알바노 호숫가에 위치한 카스텔 간돌포 별장은 교황의 소유로 양도했다. 또한 교황 일신상의 불가침성 및 주권의 인정과 더불어 모든 영적 기능의 자유로운 행사를 보장하였다. 그러나 비오 9세 교황은 이 제의를 일축하였고, 계속 항의하며 ‘바티칸의 포로’로 머물렀다. 그는 이탈리아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논 엑스페딧」(Non expedit)이란 교령을 통해 정치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였다(1874). 그러나 교황의 이러한 조처로 인하여 교회에 호의적인 사람들을 정치에서 멀리하게 만들고 과격파들에게 싸움터를 넘겨주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 이탈리아 정부는 점점 반교회적이 되었다.

 

교황 비오 11세에 이르러 파시스트 무솔리니(B. Mussolini)와 1929년 2월 11일 ‘라테란 조약’(Patti Lateranensi)을 맺음으로써 소위 ‘로마문제’가 해결되었다.

 

이 조약은 세 가지 형식의 차원에서 체결되었는데 먼저 27개항으로 된 일반협정(Trattato)과 45개항으로 된 정교조약(Concordato), 그리고 이탈리아 국가는 교황청에 7억 5천만 리라를 현금으로 지원하고, 10억 리라는 국가채권으로 지불한다는 재정협약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