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21세기로 향하는 교회


② 막시밀리안 콜베신부 - 강제수용소의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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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반에 독일에서는 전체주의의 한 모습인 나치즘이 ① 독일인들의 혈통에 대한 순수성을 완전하게 유지하는 것. ② 위협적인 볼셰비즘적 공산주의세력을 막기 위한 독일 군대의 강화. ③ 강력한 단일 지도체제와 규율아래 모든 독일세력의 일. 라는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독일 국민들에게 커다란 동의를 받으며 발전하였다.

 

그리고 독일 나치 제국정부의 교회에 대한 탄압은 3단계에 걸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첫 단계(1933-1934)는 위장된 조치를 통해서 나타났다. 히틀러 자신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로젠베르크(Rosenberg)와 같은 하수인들을 통해서 반란(‘룀의 반란’, 1934. 6. 30)을 일으키게 하고 클라우즈너, 융과 같은 가톨릭의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또한 히틀러 스스로 인종적 반(反)유대주의를 국가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생각했기에 1933년 1월 30일부터 독일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 4월부터는 유대인 상점에 대한 전반적인 불매운동을 선포하자 교회 세력들은 이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제2단계(1934-1939)에서는 교파에 관계없이 무차별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교회의 모든 단체와 청년조직의 금지, 학교에서 종교교육에 대한 금지, 교회의 유치원 및 기타 사회, 자선사업에 대한 재정 보조금 취소, 교회언론에 대한 억압, 설교금지, 신부와 평신도에 대한 체포 등이었다. 또한 1938-1939년에는 종교학교들과 많은 수도원 그리고 가톨릭대학과 신학부들을 폐지하였고 1938년 11월 9일 ‘수정의 밤’(Kristallnacht)을 통해서 유대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대학살 프로그램이 실시되었다.

 

제3단계에서는(1940-1945) 전쟁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는데 정복지에서도 교회에 대한 탄압이 지속되었다. 

 

한편 유대인에 대한 본격적 박해는 1941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처형과 고문, 영양실조, 전염병, 사살에 의한 대량 살육으로 아우슈비츠에서만도 1941년 말이래 3백만 내지 4백만 명이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또 다른 죽음의 수용소들을 포함해 살해된 유대인의 수는 약 6백만 명이었다. 

 

또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그들의 신앙을 지키다 강제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하고 죽어갔다. 야만적인 나치스들은 사제들만도 4000명을 살해하였다. 당시 한 유대인의 탈출에 대한 본보기로 10명의 죄수를 처형하는데 그 중 한명은 어린자식과 아내가 있다고 살려달라는 애원을 했고 이 광경을 보고 있는 한 사제가 <나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내가 지금 눈물을 흘리는 저 가족의 아버지 입장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수용소장이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이 말로써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원이었던 막시밀리안 콜베신부는 10명의 다른 죄수들과 함께 아우스비츠 강제수용소의 한 벙커에서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오직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신부님의 덕분으로 목숨을 구한 사람은 ‘가요비니체코’라는 사람으로 “그때, 신부님과 이야기하지는 못했습니다만,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몇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어 기적적으로 살 수 있었다고 하면서 그렇게 훌륭한 사제를 죽음으로 몰아낸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심한 자책을 했다고 한다.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콜베 신부의 놀라운 사랑과 희생을 기리며 ‘사랑의 순교자’로 시성하셨다. 피의 순교자는 아니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사람에게 영혼의 생명을 부여한 신부님께 최고의 영예를 내리신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