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교회와 개혁


⑤ 요한 칼뱅과 그리스도교 강요(Institutio religionionis Christian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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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칼뱅(Jean Calvin = Jean Cauvin)은 북프랑스 오랜 가톨릭 도시 노용(Noyon)에서 1509년 7월 10일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많은 압박을 받아온 지역이며 권력남용을 철저히 반대하던 지역이다. 북프랑스는 유명한 인문주의자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으로서 그도 이런 지방의 비판정신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4세 때부터 파리기숙사에서 라틴어를 배우고 1524년 이후 참회, 엄격을 강조하는 ‘몽테귀’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몽테귀 대학은 이전에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가, 또 이후에 예수회를 창설한 스페인 사람 이냐시오 로욜라가 공부한 곳이다. 그 후 그는 부친의 의도로 오를레앙 대학에서, 1529년에는 부르주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1532년에는 『자비론』(De clementia)이라는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을 저술했다. 1533-1534년 사이에는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하면서 개신교로 전향했다.

  

그 후 슈트라스부르크를 거쳐 바젤에 이르러 거기서 여러 종교 개혁가들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1536년 3월에 익명으로『그리스도교 강요』를 작성했다. 이 저술은 박해받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를 위한 변명서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저술을 통하여 프랑스 개신교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이 저술은 그 후 자신에 의하여 여러 번 수정되고 첨가되어 1559년 최종판이 나왔으며 오늘날 개혁교회에서는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 후 그는 제네바에서(1536) 설교가요 본당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시의회를 통해 1년에 4회의 성찬식을 거행하는 교리와 아울러 「교회규정과 새로운 신경을 겸한 교리서」를 간행하여 시의회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1537년 4월에는 모든 시민이 이 신조에 서약을 하도록 했다. 거부하는 자는 시민권을 상실하고 이주해야 했다. 

 

이런 조치에 대한 제네바 시민들의 반대로 그는 제네바를 떠났다가 다시 그의 신봉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그는 1541년 제네바로 돌아가서 그해 11월 20일에 새로운 교회제도 즉 「교회법규」(L'Ordonnances ecclesiastiques)를 시의회에 제출하여 법률화했다. 이 법규에서 교회의 4개 직무를 규정하고 있는데 목사(pastours), 교사(doctor), 장로(anciens), 집사(diacres)가 그것이다. 여기에 두 개의 상급 위원회를 두었는데 목사들과 교사들로 구성된 ‘사목자 형제회’(Venérable compagnie)는 교육과 성직자들의 품행감독과 임명을 담당하였으며, 목사들과 12명의 평신도 장로들로 구성된 ‘감독위원회’(la consistoire)는 중세의 이단신문과 유사하게 신자들의 종교적 도덕적 생활을 엄격하게 감시하는 직무를 담당했다. 

 

이처럼 시의회의 힘을 입은 칼뱅은 이제 제네바를 ‘개신교의 로마’라는 명성을 들을 정도로 개신교회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영국과 같은 전 유럽으로부터 많은 프로테스탄트인들이 제네바로 모여들게 했다. 또한 제네바의 칼뱅주의는 성체에 대한 취리히의 츠빙글리 교리를 칼뱅교리와 일치시키면서 프랑스, 영국, 스웨덴, 폴란드, 헝가리, 네덜란드 비롯해 독일의 여러 제후국들에도 놀라울 정도로 퍼져나갔다. 특히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루터주의 보다 칼뱅주의가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했으며 영국에서는 청교도의 이상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소위 ‘개혁교회’라 불렸다. 칼뱅은 1564년 5월 27일 제네바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