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교회와 개혁


⑥ 영국의 왕, 헨리 8세(1509-1547)와 영국교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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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교회 분열의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보면 헨리 8세는 아라곤 왕조의 스페인 가톨릭 왕인 페르디난도의 딸이자 카알 5세 황제의 숙모인 캐더린(Catherin of Aragon)과 이미 결혼하였다. 캐더린은 헨리의 형이며 왕위 계승자인 아더(Arthur)와 결혼했으나 병중에 있던 아더가 곧 사망하자 캐더린은 1503년 교황으로부터 인족장애(姻族障碍)의 면제를 받은 다음 겨우 12세의 헨리와 결혼하게 되었다. 헨리와 캐더린에게서 일곱 남매가 태어났으나 메리 튜더 하나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어려서 다 죽었다. 그 후 헨리 8세는 1527년경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지면서 그의 형수와의 결혼에 대한 무효화를 표명하기 위해 다양한 요구를 시도했다.

 

의회와 기타 모든 법정에 대해 왕과 캐더린의 결혼을 풀거나 무효로 선언하는 사람은 파문당할 것이라는 교황의 위협 아래에서도 헨리 왕은 1531년에 영국교회의 고위성직자의회를 소집하게 하고 왕에게 동조하지 않은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모어(Thomas More)를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로 교체시켰다. 그리고 자신을 영국 교계로 하여금 ‘최고의 수장’으로 인정하게 했다. 1533년 1월에 비밀리에 앤과 결혼식을 거행하고 5월 23일에는 캐더린과의 결혼을 무효화 시켰다. 이에 1534년 7월 교황으로부터 헨리와 크랜머 대주교에게 각각 파문의 위협이 내려졌다. 이 때부터 영국 정부는 본질적으로는 가톨릭 신앙에 바탕을 두면서도 가톨릭과 루터교를 모두 박해했으며 영국 국가교회(Anglican Church)인 성공회로의 개혁은 큰 저항 없이 수행되어 갔다.

 

1538년 교황 바오로 3세는 교황교서를 통해 헨리를 파문하였으며 모든 자신의 신하들이 왕에게 하는 충성서약도 무효임을 발표했다. 이 파문은 그를 이단자로서가 아니라 교회를 분열시킨 열교(裂敎)자로서 파문한 것이었다. 당시 헨리는 스페인, 프랑스 왕과 독일 신성로마제국 황제 등이 아직 가톨릭적 분위기를 고려해 자신이 교황에 관련된 문제만을 제외하고 아직 정통 가톨릭을 수호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헨리는 1539년에 소위 ‘신앙 6조항’을 법으로 발표해 성체의 실체변화, 단형 영성체, 연미사, 비밀고백, 사제의 독신제, 수도서약 등을 반대하는 것을 사형으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가톨릭적 경향은 교회분열에도 불구하고 헨리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영국서의 가톨릭인들의 상황은 1700년대 말까지 갖은 수모를 겪다가 미국과 프랑스혁명이 있고 난 후에야 상황이 나아졌다. 특히 뉴먼(Newman; 1801-1890)시기에 와서 가톨릭의 상황은 더 나아졌는데, 그것은 1852년 교회쇄신을 위한 웨스트민스트 교회회의를 통해서 나타났다. 성공회 추기경이었던 그는 1845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에 영국에서 이전에 열악한 조건에 있던 가톨릭신자들을 대변하고 성공회와 가톨릭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며 특히 가톨릭의 신학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