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장례식에 초대합니다"



▲ 자신이 주선한 장례식(고별식) 연회장에 앉아 있는 이재락 박사와 누님


살아 있는 사람이 장례식을 치렀다. 또한 그가 직접 장례식을 주선하기까지 했다.

서양 장례식은 장의사에서 치러지는 게 통념이다.

장의사에는 입관 예배를 드릴 수 있는'채플(작은 예배당)'이 있고, 그 옆에는 다과를 나누는 응접실이 붙어 있다. 입관된 시신에 마지막 경의를 표한 조객들은 응접실로 이동하는데, 그때부터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경건 모드'가 삽시간에 '사교 모드'로 바뀌는 것이다. 조문객들은 망자를 언제 봤느냐는 듯오랜만에 만난 지인을 반기며 더러 웃기도 한다. 접시에 가득 음식을 싸 놓고,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관 속에 누워 조문을 받는 순서가 끝나면 이처럼 망자는 여지없이 '찬밥 신세'가 되고 만다. 망자 입장을 살핀 한 어른이 자신의 독창적인 방식을 들고 나왔다. 죽어서 '찬밥 신세'가 되는 대신 살아서더운 밥을 같이 나누자고 나선 것이다.

올해 83세인 내과의사 출신인 이재락 박사는지난 4월 느닷없이 캐나다 토론토의 <한국일보>에 공개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의 제목은 '나의 장례식'. 그 편지에서 "제목이 좀 이상하다, 그러나 이 글의 말미쯤에는좀 이해가 되리라고 생각한다"고 서두를 깔았다.
이어서 연유의 설명이 뒤따랐다.

망자가 '찬밥 신세'인 장례식 싫다...살아서 더운 밥 같이 나누자.




▲ 조객(하객)들과 손을 부여잡는 이재락 박사.(캡 쓴분) 조객들

나는 한국에서는 군의관 생활 3년 외엔 사회생활을 하지 못해 장례식에 참석한 일이 없다.
그리고 55년 전 미국에 왔다. 의료에 종사한 첫 25년 동안엔 이곳 백인들의 장례식에도 가본 일이 없다.


그때 그 시절엔 내 친구들이 모두 젊은 나이였기에 해당 사항이 없었기 때문일 게다.
그후 25년을 이곳 토론토에 거주하면서 친지, 지인들의 장례식에 참석한 일이 여러 번 있다.

장례는 그 민족, 그 나라 또는 그 지역에서 몇 천 년 동안 내려온 문화와 그 당시의 내세관,또는 인생관의 총집결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생각한 일인데 내가 거동도 하고, 말도 하고 아프지도 않을 때 지인들과 친지를 모시고회식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한 인간의 삶의 끝마무리를 하고 싶다.

친지, 지인들과 웃으면서 즐겁게 담소도 하고 작별인사를 하는 그런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이를 장례식이라 해도 좋고, 마지막 작별인사 모임이라 불러도 좋다."
토론토에 25년 동안 살면서 참석한 장례식에서 이 박사가 느낀 것은 '망자만 억울하게 찬밥 신세'가 되는 장례식 풍경이었다. 그는 그것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그 전통을 깨는 길 밖에 없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내 장례를 준비할 상황에 처해 있다. 나는 금년에 83세인데 며칠 전 담낭암(쓸개암)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후 MRI란 검사를 하니 이젠 담낭암이 간, 위에도 퍼졌고 복부 여러 곳의 복막에도 퍼져 이젠 소위 말기암 상태라 한다.

아직 아픈 데도 없고 잠도 잘 자고 있으니 말기암이란 MRI 촬영 결과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내 상태가 태풍전야의 일시적 고요라고 하며 두 달, 또는 석 달 계속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 조객(하객)들에게 인삿말을 하는 이 박사

결혼식 피로연을 전문으로 하는 연회장이 장의사의 장례식장으로 돌변했다.
살아 있는 이 박사가 관 속에서 누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손을 잡으며 조객들을 맞았다. 연회장의 입구에는 접수가 있었지만, 들고 오는 봉투는 정중히 사양했다.


이 박사는 이 점도 미리 분명히 밝혀 두었다. "몇 가지 부탁이 있다. 하나는 장례식에서 흔히 보는 소위 조의금은 없었으면 한다.
둘째는 복장인데 일기에 따라 야외피크닉용이 적당하고, 부인들은 꽃무늬가 있는 예쁜 옷이 좋을듯하다.


다만 한 가지 예측 못할 일은 나의 암 진전 상태다. 만일 들것에 실리는상태가 되면 이 모임은 부득이 취소할 수밖에 없다."
지난 9일(토) 정오 연회장 '타지'(Taj)에 300여 조객들이 몰려들었다. 조객들은 검은 양복이나 검은 드레스 대신 평상시의 외출복을 입었고, 꽃무늬가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들도 눈에 띄었다.

처음 이 박사가 이런 장례식을 제의했을 때 세 아들은 '뜨악'해 했다. 이 박사는 "첫째와 셋째 며느리는 비 한인인 데다 아들들 모두 한국말이 서툴러서 장례식 방문객을 제대로 맞이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했다.

맏아들(성구)은 캘거리대 의대교수이며,매길대에서 컴퓨터 석사 학위를 받은 둘째(원구)는 은행에 근무한다.셋째(충구)는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의사(방사선치료학)로 일한다.

"검은 양복·드레스 대신 꽃무늬 있는 예쁜 옷 입고 오세요"




▲ 무대에 나와 각 자 아버지와의 지난 날을 회고하는 세 아들들

1929년 11월 경북 안동 태생인 이 박사는:
1946년 서울 경복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농과대학에 다니다
의대로 옮겨, 54년 3월 졸업과 동시에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군복무 중 미군 장교의 도움으로 미국 덴버에 있는 육군병원에서 7개월간 실습했다.
귀국했다가 57년 다시 도미, 시카고대학병원 등에서 내과 수련을 쌓았다.
이후 시애틀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63년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 정착했다.


뉴펀들랜드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그랜드폴스에 거주하며
내과과장, 의료원장, 뉴펀들랜드 메모리얼의과대학 부교수로 봉직했다.
85년 토론토로 옮겨온 뒤에는 블루어 한인 타운 내에 병원을 개업, 2000년대 후반까지 일했다.

캐나다의 외딴 곳인 뉴펀들랜드에서 간호사협회장을 지낸 어떤 지인도 멀리 비행기를 타고 이번 장례식에 참석했다. 와인을 곁들인 회식이 끝나고, 잔치는 계속 되었다.

인삿말에서 이 박사는 "죽어서 장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의 손을 잡고 웃을 수 있을 때 인생의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박사는 "원래 7월에 할 생각이었는데, 암 전문의인 아들들의 조언에 따라 일정을 앞당겼다"며 "최근 검사를 받아보니, 암이 거의 커지지 않았다고 해 너무 서두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가족 소개와 헌시 낭송, 지인들의 '나와 이재락 박사' 이야기, 색소폰 연주 그리고 아들 삼형제가 말하는 이 박사의 일생, 마지막으로 장남 성구씨가 무대에서 노래했다.





▲ 가수 프랑크 시나트라가 부른 'My Way(내가 걸어온 길)'을 열창하는 큰아들 성구씨.

노래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내가 걸어온 길(My Way)'이었다.
1967년 프랑스 작곡가에 의해 발표된 이 곡의 가사를 2년 후 캐나다 출신 가수 폴 앵카가 다시 썼다.
동시대의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에 대한 헌사로였다.


플로리다에서 만났을 때,프랭크 시나트라는 그에게"I'm quitting the business. (난 이 비즈니스를 걷어치울 거야. I'm sick of it,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I'm getting the hell out (이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해)"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비즈니스'는 음악이었다.

하지만 실은 죽음을 앞두고 되돌아보는 인생으로 은유된다. "이제 종말이 다가온다./ 나는 마지막 커튼을 마주한다./ 친구야, 분명히 말할게/내가 확신했던 내 삶을 얘기할게. 난 완전한 삶을 살았어./ 가야 할 모든 길을 가 봤어/ 그리고 그 이상이었던 것은/내 방식 대로(my way) 살아 왔다는 거야./ - - -( 하략 )"

큰 아들이 부르는 노랫말을 듣고 이 박사는 무슨 감회를 느끼고 있었을까?
완전했던 삶의 마지막 커튼을 마주하면서 일생의 마침표까지 자기 방식대로세상을 마주했다는 안도의 날숨을 조용히 내쉬지는 않았을까?